
18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 4·3영령들에게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봉헌식이 진행되고 있다. 2025.7.18/뉴스1 © News1 오현지 기자
"4·3 영령님들께 고합니다. 2025년 4월 11일. 제주 4.3의 아픔과 진실을 담은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지난 18일 오후 양성주 4·3희생자유족회장은 엄숙한 목소리로 영령들에게 진실 규명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제주4·3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고했다.
이날 오후 4시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4·3영령들에게 4·3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음을 알리는 봉헌식이 진행됐다. 이어 오후 7시에는 제주탑동해변공연장에서 '세계가 기억하는 제주4·3, 기억으로 잇는 평화의 울림'을 주제로 공식 등재기념식과 평화 음악회가 열렸다.
지난 4월 제221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가 4월 11일 오전 6시 5분(프랑스 현지 시각 4월 10일 23시 5분),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
제주4·3기록물은 진실 규명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1만 4673건의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다.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옥중 엽서(27건), 희생자와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1만 4601건),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운동 기록(42건),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3건) 등이 포함됐다.

제주 4.3평화기념관에 게시된 설명. 미군정은 '제주도 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라며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로 규정했다. 2025.07.18/ © 뉴스1 김민수 기자
'레드아일랜드'로 낙인…7년 7개월간의 충격과 공포
제주 4·3사건은 근현대사의 비극으로 꼽힌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인구가 급증했고, 대흉년과 실업난, 콜레라 등으로 인해 혼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발포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기념식 행사 직후 기마경찰이 어린아이를 쳤음에도 조처를 하지 않자, 분노한 민중들이 경찰서로 몰려갔다. 이에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6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했다. 미 군정은 '제주도 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라며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로 규정했다.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서청)의 검속과 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 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 처분 등이 이어졌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시작된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인 1954년 9월 21일에서야 끝이 났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인근에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다. 북촌리 주민 학살 사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 됐지만,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25.07.18/© 뉴스1 김민수 기자
끔찍한 결과, 희생자만 3만 명
사건의 결과는 끔찍했다. 희생자만 1만 4935명에 달했다. 이는 확인된 피해만 집계된 것으로, 도민의 10분의 1인 2만 5000~3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희생자 33%는 노인이나 어린이, 여성이었다.
수많은 비극이 있었지만, 특히 '북촌리 학살사건'은 가장 끔찍한 민간인 학살 사례로 꼽힌다. 1949년 1월 서청 단원으로 편성한 진압부대가 조천면 북촌리에서 주민 400명 이상을 한꺼번에 총살 했다. 북촌리학살 사건은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됐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은 이날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이곳에는 애기무덤 20여 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학살 사건 때 어른들의 시신은 다른 곳에 안장됐다. 하지만 어린이의 시신은 임시 매장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떠나간 이를 입밖에 조차 낼 수 없었다. 북촌 대학살 사건 5년 후 일어난 '아이고 사건'이 일어났다. 1954년 1월 23일, 주민들은 초등학교 교정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김석태의 고별식과 '꽃놀이'를 하던 중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소각된 날이며 여기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지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는 한 주민의 제안에 따라 묵념했다.
마을에서 '아이고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1954년 1월 23일 벌어졌다.
이날 주민들은 초등학교 교정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김석태의 고별식과 속칭 '꽃놀이'를 하던 중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소각된 날이며 여기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지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는 한 주민의 제안에 따라 묵념했다. 그때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에 알려져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너븐숭이 4·3유적지에 있는 '순이삼촌' 문학비. 현기영은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 사건의 참혹함과 그 후유증을 고발함과 동시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 시켰다. 2025.07.18/ © 뉴스1 김민수 기자
오랫동안 강요된 '침묵'
북촌리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는 오랫동안 4·3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1960년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듬해 5·16 쿠데타가 벌어지면서 물거품이 됐다. 오히려 이러한 목소리는 탄압을 받았다.
쿠데타 이후 17년 뒤인 1978년. 침묵 속에서 한 소설가가 입을 열었다. 현기영은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 사건의 잔혹성 등을 정면으로 다뤘다. 진실을 말한 대가는 참혹했다. 소설가 본인은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소설은 판매 금지됐다.
하지만 강요된 침묵은 영원할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4·3의 억울한 목소리가 세상으로 다시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공개 추모제 행사가 열릴 수 있었다.
1993년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가 출범했으며, 1995년 도의회의 '4·3피해조사 보고서'가 세상에 나왔다. 2000년에는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됐고, 2003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작가 한강은 지난해 12월 7일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작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4·3 사건은 아직 우리와 작별하지 않는다.

제주 4.3평화기념관. 2025.07.18/© 뉴스1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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