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우충원 기자] 한국에게는 '도하의 기적'을 일본 축구의 레전드 이하라에게는 여전히 '도하의 비극'이었다.
1993년 10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는 한국 축구 역사에서 ‘도하의 기적’으로, 일본 축구계에서는 ‘도하의 비극’으로 불린다. 단 20초 차이로 월드컵 본선 티켓의 주인이 바뀌었고, 그 순간이 아시아 축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한국은 북한을 상대로 고정운, 황선홍, 하석주의 연속골로 3-0 완승을 거두고 본선행 가능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일본과 이라크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일본은 경기 종료 직전까지 2-1로 앞섰고 일본 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위해 사상 처음 전세기까지 띄울 정도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사활을 걸었다. 당시 일본 대표팀 벤치와 선수단 모두 이미 승리를 확신했고 월드컵 본선행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후반 추가시간이 시작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추가시간 1분, 이라크 공격수 움란 자파르가 헤더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종료 휘슬이 울린 순간, 2-2 무승부라는 믿기 힘든 결과가 전광판에 찍혔다. 일본 선수들은 그대로 경기장에 주저앉았고, 좌절감에 얼굴을 감싼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반면 한국은 승점에서 일본과 동률을 이뤘지만 득실차에서 앞서며 아시아 지역 풀리그 2위에 올라 1994 미국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했다. 20초 차이로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극적으로 엇갈린 순간이었다.
당시 국내 한 지상파 캐스터가 생중계 도중 외친 “한국 진출! 일본 탈락!”이라는 외침은 지금도 전설적인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한국 팬들에게는 극적인 반전을 이룬 ‘기적’이었고, 일본 축구에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비극’이었다.
이날 도하에서 경기장을 지킨 일본의 전설적인 수비수 이하라는 최근 일본 매체 스포니치 아넥스를 통해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일본 국가대표로만 122경기를 소화했던 이하라는 “정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의 기억은 거의 없다”며 당시 충격을 털어놓았다. 이어 “이라크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본선 진출을 확신했다. 한국전에서 이겼다는 사실이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고,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겼던 것이 함정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하라는 현재 수원 삼성의 코치로 부임했다. 자신과 일본대표팀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던 한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이하라는 실점 장면에 대해 “추가시간이 시작됐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조금 더 시간을 잘 썼다면 우리에게 도하의 기적이었다. 이라크는 일반적인 롱 크로스 대신 짧은 코너킥을 선택했고, 카즈(미우라 가즈요시)의 대응이 조금 늦었다. 크로스가 내 앞에 있던 선수에게 이어졌고 헤더가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그 순간 월드컵 티켓이 사라졌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남은 시간은 있었지만 모두가 이미 포기한 표정이었다. 경기장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국과 승점은 같았지만 득실차로 본선행 티켓은 한국에 돌아갔다. 그날 일본이 월드컵에 나갔다면 일본 축구는 훨씬 더 빨리 성장했을 것이고 내 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다”라며 씁쓸함을 숨기지 못했다. / 10bird@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