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고래의 심장처럼…“부친께 바치는 아들의 해석” 백경증류소[전통주짐작]

경제

이데일리,

2025년 7월 20일, 오전 06:05

짐작은 ‘헤아림’을 의미하는 단어로 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헤아릴 짐(斟), 따를 작(酌). 술병 속에 술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린다는 뜻으로 ‘술을 남에게 잘 따라주는 일’에서 ‘상대를 고려하는 행위, 사안의 경중을 헤아리는 작업’까지 의미가 확장됐습니다. 우리 전통주, 잘 헤아려보겠습니다.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세종시 장군면 들녘, 한약 냄새와 누룩 냄새, 발효의 기운이 어릴 적부터 익숙한 사람이 있다. 익숙한 냄새로 휩싸인 집에서 자랐고 술을 담그는 손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렇게 장성한 정창윤 대표는 백경증류소를 그 자리에 세웠다.

(사진=한국중소벤처기업유통원)
단순한 양조장이 아니다. 한의학 가문의 기억과 몸의 감각이 전통주의 구조 안에 스며든 공간.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속 흰 고래 백경(白鯨)에서 양조장의 이름을 따왔다. 백경처럼 도전과 자유, 불굴의 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백경증류소는 한의학의 ‘법제’(法製) 개념을 전통주 양조에 접목했다. 약재를 다루듯 재료의 성질과 기운을 살핀다. 누룩은 단지 발효제가 아니라 기운을 담는 매개체이고 술은 기호품이 아닌 ‘정서적 구조물’이다. 누룩도 약초처럼 정성껏 반죽하는 곳, 바로 백경증류소다.

정 대표의 부친이 내려준 유산이다. 정 대표의 아버지 정태영 마스터는 누룩을 시장에서 사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고르고 띄우고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술을 담그기 전 그날의 공기의 온도, 벼의 수분, 물의 흐름 등을 감각적으로 읽었다. 그 감각은 고스란히 ‘백경’이라는 술에 녹아 있다.

백경증류소의 술은 쌀을 키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세종시 장군면 자가 논에서 직접 재배한 단일 품종 쌀을 선별한다. 직접 손으로 빚는 누룩은 밀, 녹두, 쌀을 조합해 계절의 온습도에 맞춰 발효하는 시간을 조율한다. 누룩마다 기운이 다르다. 밀은 온화하고 녹두는 고요하다.

빚어낸 술은 13℃에서 장기간 발효해 3℃에서 180일 이상 숙성된다. 손으로 빚은 누룩은 발효가 느리지만 그만큼 향이 부드럽고 층이 깊어진다. ‘양조는 결국 시간이 하는 일’이라는 백경의 철학은 이 모든 공정을 통해 구현된다.

백경증류소의 대표 시리즈는 프리미엄 주류 시장을 겨냥한 ‘백경15’로 15도의 증류주다. 백경15 골드는 흰 꽃, 레몬껍질, 청사과 등 시트러스 중심의 향에서 출발해 과실향까지 이어진다. 목 넘김은 부드럽고 단맛과 산미가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는 술이다.

백경15 화이트는 복숭아, 자두, 거봉, 열대과일의 달콤한 향에 은은한 꽃 향을 더해 깔끔하고 정갈한 스타일의 약주고 백경15 블랙은 청포도와 복숭아 향으로 시작해 다양한 과실 풍미가 어우러지는 술이다. 와인을 연상케 하는 미네랄리티와 산미로 식욕을 자극한다.
(사진=한국중소벤처기업유통원)
골드는 해산물, 샐러드와 조화를 이루고 화이트는 닭고기 요리, 치즈 플래터와 잘 어울린다. 블랙은 양념 갈비, 스테이크 같은 육류와의 페어링을 자랑한다.

백경증류소는 단지 술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통주 문화와 양조 미학을 공유하고자 양조장 견학, 술빚기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할 예정이다. 현재는 ‘백경한잔’이라는 180㎖ 소용량 제품도 개발 중이다. 6월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7월 중국, 9월 미국, 11월 프랑스까지 수출도 본격화하고 있다.

정 대표는 “백경은 단순한 창업 브랜드가 아니라 한 집안에서 이어져 온 감각과 철학의 정리이자 아버지에게 바치는 저만의 해석”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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